오늘 보고 온 [왕의 남자]. 개봉 1년전부터 아는 사람은 이미 알 정도로 회자되었던 이준기의 미모나 그 제목 때문에 이미 관심은 갖고 있었다. 개봉되고 나서도 홈페이지를 미리 찾아가 보거나 예고편을 본다거나 시놉시스를 읽어보는 등의 액션은 안 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론 플러스였다. 사전 정보를 전혀 얻지 않고 영화 보는 것도 괜찮구나.
보고 와서 홈페이지를 들렀는데 오히려 영화 보는 재미를 반감시킬 듯한 느낌도 든다. 요즘 한국영화 마케팅, '너무 보여준다'. 예고편만 봐도 재미없을 듯한 영화는 대충 감이 온다. 제작비나 배우,감독 이름만 열심히 어필한다거나...이러면 그만큼 내용에 있어 어필할 게 없다는 얘기. 또 어느 버전의 예고편을 봐도 똑같은 장면만 계속 나오면-열명이 감상평을 써서 열명이 좋다고 하는 대사나 장면이 한결같으면- 그 영화는 재미없다. (대표적인 게 원더풀 데이즈다. ㅎㅎㅎ)
같이 보러 갈 상대 찾기가 꽤나 힘들었던 영화이기도 했다ㆀ 제목에서부터 깔려 있는 동성애 코드 때문인가, 사내자식들은 영 볼려고를 안 한다. 결국 마이어무니와 함께 가서 봄. 재밌었죠~ 혼자 갔더라면 두 번 보고 왔을지도.(살인의 추억 때 그리 했다)
가장 먼저 칭찬해 줘야 할 건 짜임새 있는 구성. 원작이 된 연극이 있다던데 영화의 신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다. 보면서 다음번엔 어떻게 될 것인가.. 예상해 보곤 했는데 하나하나 다 맞더군.ㅎㅎ '저거 만화로 만들 때에도 써먹을 수 있겠군'싶은 연출도 꽤 보였는데... 예를 들어 공길이가 안기러(?) 갔을 때 혼자 남은 장생의 탈이라든가..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위트도 멋지다. 말로 옮기면 그닥 재미없는 상황 유머가 많은데 솔직히 전반부는 1분마다 한번씩은 웃음이 터져나왔던 것 같다구. 이래서 영화는 극장에서 여럿이 봐야 한다. 수십명이 큰 화면 보며 함께 웃는 기분 괜찮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 또 한 가지..모든 영화가 다 그렇지만 큰 화면으로 보면 박력이 넘친다. 광대들이 흥겹게 놀 때에는 함께 내려와 흔들리던 카메라가 궁궐에서는 압도적으로 변하여 배우들을 내려다본다. 연산군이 두다다다다다~ 달려갈 때 온 대신들의 '통촉하여 주십시오~' 합창의 압박이란..이것이 바로 그 때의 조정이란 곳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사치가 절고 절었을 때라 의상의 화려함도 극에 달해있다. 배우들의 표정 연기도 큰 화면에서 좀 더 섬세하게 잡힌다. 눈 끝 떨림까지. (정진영씨 그대는 눈 밑 근육까지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겁니까? 근데 화낼 때나 슬플 때나 눈 근육 움직임이 똑같다니요 그건 에러여요)
이 영화의 곳곳에 배우들이 노력한 흔적이 그야말로 처절하게 묻어난다..특히 그 어려운 외줄타기를 직접 배웠다는 감우성씨! 존경합니다..보는 사람이 아찔하두만! 하긴 영화 보면서 연기에 감탄할 꺼리는 외줄타기 말고도 많다. 광대극을 벌일 때의 익살과 재주, 대신들을 풍자하는 희극을 벌일 때의 목소리 변조까지(가면 벗을 때에야 장생이었어? 싶었다). 장생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진 드라마성과 감정 표현을 완연히 자신의 옷으로 입어버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자유로웠고 그래서 강할 수 있었던 광대 [장생]은 질투에 얽매이는 바람에 결국 그 자유도 광대로서의 재능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울며 부르는 공길의 목소리에 헤벌쭈우우욱. 그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쭈욱 뚜렷했다.
이걸로 당신도 톱스타에요!
공길 외 기타 광대들의 완벽한 춤사위나 쇼맨십도 그렇고..특히 공길은 가면만 쓰면 완벽한 요부였다. 남자가 그렇게까지 유연한 허리돌림이나 는실난실한 웃음을 구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이 필요했을까?ㆀ 하긴 그 특유의 째진 눈에서 나오는 요염한 색기는 타고난 듯.. 지금은 메이저 드라마에 출연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그 드라마 봤지만 못 알아봤다고;;
이준기는 '이 영화를 20대에 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라고 했는데,이 얼마나 연기파스러우면서도 잔꾀 많은 발언이냐..ㅎㅎ 수없이 비슷한 꽃돌이 이미지의 신인들 사이에서 이걸로 확실하게 여성팬 확보! 인지도 확보! 본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스타탄생이다.
광끼어린 연기를 보여준 연산 역의 장진영도 캡. 정말로 연산군은 저런 사람이었을 것 같다. 녹수한테도 저랬을 것 같다고. 엄마 사랑 못 받은 위에 플러스 알파로 원하지 않는 자리의 압박감에까지 시달리는 정신분열증 환자~에 관을 씌웠을 뿐. 상당히 자주~타인과의 교류가 안되고 혼자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이 좀 멀쩡했으면 문화를 사랑하는 좋은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게...그는 논다는 게 뭔지 알고 있다고! 치정관계뿐만이 아니라 놀음에 있어서도 장생의 좋은 적수였다. 그는 희극을 지켜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난입하기도 하고, 극의 내용을 현실에 대입시켜 배우들을 망가뜨리기도 하며 완벽한 관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반면 장녹수라는 캐릭터는..인물의 관계구도를 봐서 포스터의 4인 중 하나가 된 것 같지만 차라리 허선이나 육갑이가 비중이 더 크지 않을까? 강성연 씨의 연기는 좋았지만, 억양과 발음이 어찌나 뚜렷한지 심하게 사극과는 따로 논다...저 사람 [덕이]라는 드라마 찍을 때도 그런 경향이 좀 심해서 영 아니었는데. 현대극이 딱이야 딱.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공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하고픈 얘기.
보면서 생각보다는 동성애 코드가 상당히 밍밍한데..생각했다.(전국 관객을 생각해서 타협도 한 걸까) 이제부터 공길이 점점 권력에 맛을 들여 요부가 되어가나 했는데, 결국은 끝까지 착하고 예쁜 울보로 남았을 뿐. 공길의 타락에 따라오는 긴 갈등까지 표현하기엔 러닝타임이 짧았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그렇다..이준기가 연기한 공길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어떤 부조리함. 그건 TV멜로드라마에서 예쁜 여주인공들을 보면서 느꼈던 부조리함과 비슷했다. 쟤들은 욕심도 없나? 화도 안 내나? 설사 낸다손 치더라도 예쁘기만 하네? 전혀 못돼 보이지 않네? 지켜주고만 싶네? (특히 손모씨가 심하게 그렇지)
그런 캐릭터에게는 꼭 거칠게 애정을 갈구해오는 파워남(연산)과 다소 투박하더라도 지고지순한 보호본능을 관철하는 순정남(장생)이 있기 마련 아닌가..그뿐인가, 모든 것을 가진데다 표독스럽기까지 한 라이벌(녹수)까지.킥킥킥
사실 이준기가 그렇게 완벽한 미모를 갖고 있진 않다. 단순히 예쁜 남자를 찾을 것 같으면 훨씬 더 유력한 후보들이 많이 있지...목소리가 지나치게 허스키하고, 관골이 높고 평평한 편이라 남성적인 요소도 크다(아마 그의 남자배우로서의 장래에는 장점이겠지만) 그런 그인데도 처음 가면을 벗을 때라든가, 여자 연기를 할 때의 모습은 지나치게 그럴싸해서 깜박깜박 착각을 일으킨다. 그만큼 열심히 연기했단 증거겠지. 그는 이 영화의 히로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외모보다도 행동. 보면서 몇 번이고 '쟤 저런 몸가짐을 어디서 배운거야!'하고 중얼거렸다. 뒤로 숨는다거나 움찔 움찔 한다거나 곤란한 상황에서 꼭 장생 쪽을 바라본다거나~ 결정적으로 술에 약하다. (과음하고서 구토 중 장생이 등을 두드려 줄 때 '응~ 좋아'하면서 헤실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출혈도가 컸다..ㆀ 저것은 그야말로 완受 아닌가!!)
심지어 술에 취해 쓰러질 때조차도 한 떨기 꽃 같더라는..연산이 머리를 쾅 쾅 부딪다가 하는 입맞춤은 나중에 알고 보니 애드립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정진영씨도 맛이 살짝 갔던게야..
감독..당신 죄 있습니다. 저 장면을 OK하지 말던가, 아니면 좀 더 찐하게 갔어야죠..전국 동인녀들이 드디어 사랑할 만한 국산 작품을 찾았건만 이렇게 밍밍하게 끝내시다니요..
아쉬운 건 결말이 좀 약하다는 것. 절정에서 급속 추락한 느낌이랄까? 결말이란 그런 게 아니잖아~ 허리가 싸아해 오도록 부드럽게 내려앉아야 하는 거라구. 하지만 오히려 여운은 길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두 사람의 마지막 비상보다도, 연산의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애초에 잘돼가는 커플 사이에 당신이 껴서 이 사단이 난거여...ㆀ)
p.s 웬만한 공포영화도 깔깔 웃으면서 보는 나지만 화살! 화살만은 제발...ㅠㅠ;; 덜덜덜 뾰족한 것에 노이로제 있는 사람을 괴롭히지 말아주셔!